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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네임서버 하나로 군사기지행 통화 수십만 건이 노출됐다

버려진 네임서버 하나로 군사기지행 통화 수십만 건이 노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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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망 인프라가 인터넷 도메인 위에 얹혀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실무자에게 낯설다. 그러나 2000년대 초에 제안된 ENUM이라는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전화번호의 자릿수를 뒤집고 사이에 점을 찍은 뒤 끝에 .e164.arpa를 붙이는 방식으로, 예를 들어 독일 번호 +49 30 123456은 6.5.4.3.2.1.0.3.9.4.e164.arpa 형태가 된다. 이렇게 하면 모든 독일 번호가 .9.4.e164.arpa 아래로 모이고, 이 구역은 .de를 운영하는 DENIC이 관리한다. 각 국가가 자국 번호 구역의 위임을 스스로 결정하는 분산 구조인 셈이다. 통신사가 이 도메인을 조회하면 "이 번호는 SIP/VoIP로 이 주소에서 받을 수 있다"는 응답을 받아, 비싼 회선 대신 값싼 인터넷으로 통화를 우회시키자는 발상이었다.

문제는 이 아이디어가 초기부터 거의 쓰이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죽은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표준 문서(RFC)는 이런 도메인에 통화 라우팅 정보를 담는 NAPTR 레코드만 두라고 규정하며, in-addr.arpa 같은 역방향 조회용 인프라 도메인과 마찬가지로 웹사이트 호스팅 같은 일반 용도로 쓰지 말라고 명시한다. 하지만 결국 이것도 DNS일 뿐이라, 규칙을 강제할 주체는 없다. 글쓴이 본인도 독일 e164.arpa 도메인 하나를 등록해 개인 사이트를 가리키게 해뒀는데, DENIC 연례 보고서 기준 2019년 이후 처음 등록된 사례였다고 한다. 그만큼 방치된 영역이다.

5유로에 넘어간 세 영토의 전화 구역

글쓴이는 이 시스템이 얼마나 방치됐는지 궁금해 위임된 구역 중 탈취 가능한 것이 있는지 훑어봤다. 그러다 세 개의 국가코드 구역, 0.9.2·6.4.2·7.4.2.e164.arpa가 모두 같은 두 네임서버 ns6.icb.co.uk와 ns.enum.org.uk에 위임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메인이 특정 네임서버에 위임됐다는 것은 그 도메인에 관한 모든 질의를 그 서버에 묻는다는 뜻이고, 그 서버를 장악하면 해당 도메인의 모든 DNS 응답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런데 첫 번째 네임서버는 더 이상 주소가 잡히지 않아 질의가 두 번째 서버로 넘어갔고, 그 두 번째 서버의 도메인 enum.org.uk는 만료된 상태였다. 글쓴이는 이를 단돈 5유로에 사들였다.

자릿수를 되돌리면 세 구역은 각각 +290, +246, +247, 즉 세인트헬레나, 영국령 인도양 지역(디에고가르시아), 어센션섬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영토들은 인기 있는 국가 도메인 .sh, .io, .ac를 쓰는 곳이기도 하다. 이것이 실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통신사가 이 번호들에 대해 ENUM 조회를 하면 글쓴이가 원하는 응답을 돌려줄 수 있었다. 자신의 SIP 서버로 착신을 받은 뒤 발신자 번호를 위조해 실제 목적지로 다시 걸면, 받는 사람은 원래 번호가 울리는 것처럼 보이고 정상 통화로 느끼지만 그사이에 제3자가 조용히 앉아 통화 전체를 들을 수 있다. 시스템을 여전히 쓰는 곳이 있다면, 라우팅 가능한 모든 요청에 이 짓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신고는 관료 장벽에 막히고, 로그는 쌓여갔다

글쓴이는 곧바로 영국 정부의 여러 창구에 신고했지만 아무 답도 받지 못했다. 십여 년 전 Internet Computer Bureau 측 누군가가 네임서버를 설정한 뒤 ENUM이 서서히 소멸하면서, 그 의존 관계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으리라는 게 그의 추정이다. 막스플랑크 정보학연구소의 연구자 Q Misell이 대신 RIPE에 알렸지만, RIPE도 손대지 않았다. e164.arpa 위임은 UN 산하 ITU-T 위원회가 관장하는 사안이라, 그 결정에 맞서는 것은 관료적 악몽이라는 이유였다. Q가 실제 트래픽 규모를 물었을 때 글쓴이는 세인트헬레나 구역에만 로깅을 걸고 하루를 기다렸는데 단 한 건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도 쓰지 않는다고 판단한 그는 도메인을 그대로 두고 개인 사이트, Fediverse 인스턴스, Matrix 홈서버를 올리고 친구들에게 하위 도메인을 나눠줬다.

그러다 세 구역 전체의 로그를 확인하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수십만 건의 ENUM 질의가 기록돼 있었던 것이다. 도메인 이름이 곧 뒤집힌 전화번호이므로 다시 뒤집으면 실제 번호가 나오고, 여기에 타임스탬프와 질의를 보낸 DNS 리졸버의 출발지 IP까지 함께 남았다. 세인트헬레나(9,133건)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디에고가르시아(100,170건)와 어센션섬(99,902건)이었으며 출발지 IP는 주로 미국이었다. 처음 세인트헬레나만 관찰했을 때 트래픽이 없어 보였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두 섬에는 군사기지가 있고, 결국 그는 군사기지로 향하는 통화 수십만 건의 번호와 시각을 우연히 기록한 셈이 됐다. 참고로 이 수치는 병행 네임서버가 받은 절반가량으로, 전체는 약 40만 건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통화가 가로채이지는 않았다. 글쓴이의 DNS 서버는 모든 질의에 NXDOMAIN을 응답했기에 통화는 일반 전화망으로 정상 라우팅됐다. 그럼에도 위험의 성격은 분명하다. 병사와 가족이 주고받는 수십만 건의 통화 속에는 언젠가 민감한 정보가 새어 나오기 마련이고, 그 기지의 동향에 관심 있는 국가가 몇 달간 아무도 모르게 이 위치에 앉아 있었다면 얻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글쓴이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서버를 내리고 로그를 삭제한 뒤 영국 NCSC에 두 번째로 신고했고, 이번엔 군사기지가 걸려 있다는 점에서 당국이 진지하게 반응했다.

실무자가 새겨야 할 교훈

그럼에도 즉각적인 수정은 어려웠다. 애초에 누가 위임을 설정했는지 밝혀내지 못했고, 정식 복구는 다시 ITU 위원회 문제에 부딪혔다. 1년 뒤에도 글쓴이가 여전히 도메인을 보유한 상태였는데, 구역을 비워둬 ns.enum.org.uk는 모든 질의에 NXDOMAIN만 돌려주고 있었다. 2026년 3월 20일 이란이 디에고가르시아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사건은 이런 정보가 실제로 국가 행위자의 관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직후 NCSC는 글쓴이가 다시 5유로를 들여 갱신한 도메인을 직접 넘겨받았고, 세 구역의 네임서버는 여전히 그곳을 가리키되 이제 NCSC가 통제한다.

이 사례가 남기는 것은 기술적 취약점 하나가 아니라 소유권과 책임의 공백이다. 만료된 도메인 하나가 한 국가 영토의 전화 라우팅 전체를 좌우할 수 있었고, 정작 그 인프라를 누가 관리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통신·인프라를 다루는 조직이라면 자산 목록에 들어가지 않은 위임, 잊힌 하위 도메인, 만료 임박한 등록이 곧 신뢰 경계의 구멍이 된다는 점을 새겨둘 만하다. 또한 취약점 자체보다 이를 고칠 책임 주체가 관할권 다툼 속에 흩어져 있을 때 대응이 얼마나 늦어지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결국 글쓴이는 도메인 비용 10유로만 쓰고 버그 바운티도 받지 못했지만, 죽은 시스템일수록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큰 위험이라는 교훈은 분명하게 남았다.

SOURCE · HACKER NEWS
원문 전체 보기 → https://lina.sh/blog/hijacking-e164-ar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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