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톤 참가자에게 나눠주는 명찰형 배지는 이제 하나의 하드웨어 장르가 됐다. 미국 데프콘(DEF CON)의 전자 배지 문화가 대표적인데, 참가 인증을 넘어 납땜과 임베디드 프로그래밍을 익히는 교보재이자 수집품 역할을 한다. 최근 공개된 '연금술·우주론(alchemical-cosmological) PCB 배지'는 이런 흐름을 저비용으로 재현한 개인 프로젝트다. 제작자 카이 페레이라(Kai Pereira)는 중국 선전에서 열린 '폴아웃(Fallout)' 해커톤을 위해 하루 만에 이 배지를 설계했다고 밝혔다.
세 장을 쌓아 만든 입체 구조
이 배지의 특징은 인쇄회로기판(PCB) 자체를 조형 요소로 쓴 점이다. 배지는 세 장의 PCB를 겹쳐 쌓은 구조로, 가운데 '태양(inner sun)' 보드와 그 바깥을 감싸는 두 장의 '고리(outer ring)' 보드로 구성된다. 두 고리 보드는 안쪽 보드의 테스트포인트에 납땜되며, 두 번째 고리를 180도 회전시켜 붙임으로써 평면 기판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했다. 별도의 기구물 없이 기판을 적층하고 회전시키는 것만으로 시각적 깊이를 만든 셈이다.
빛은 WS2812B 네오픽셀(NeoPixel) LED가 담당한다. 고리 부분은 솔더마스크를 벗겨내 노출시켜 놓아 네오픽셀 빛이 기판을 투과해 비치도록 했다. 제작자는 효과를 내기 위해 굳이 두 고리 모두에 LED를 달 필요는 없고, 한쪽 고리에만 네오픽셀을 실장해도 충분하다고 설명한다. 부품 수와 납땜 수고를 줄이려는 실용적인 선택이다.
10센트 MCU라는 핵심 선택
두뇌 역할을 하는 것은 WCH의 CH32V003 마이크로컨트롤러다. 이 칩은 개당 10센트 수준의 초저가 RISC-V MCU로, 최근 몇 년 사이 취미 하드웨어 진영에서 저비용 프로젝트의 사실상 표준처럼 쓰이고 있다. 배지 한 개의 총 제작비는 최소주문수량(MOQ) 기준 약 10달러지만, 여러 개를 한꺼번에 만들면 3달러 미만까지 낮출 수 있다는 것이 제작자의 추정이다. 제한된 예산 안에서 가능한 한 저렴하게 만들겠다는 목표가 부품 선택 전반에 반영돼 있다.
전원은 좌상단 배터리 커넥터에 2.7V~5V 사이의 소형 배터리를 연결해 공급한다. 제작자는 보드 사이 틈에 끼워 넣을 수도 있는 작은 리튬폴리머(LiPo) 배터리를 권한다. 프로그래밍은 보드 중앙의 헤더 핀을 통해 SWIO 방식으로 이뤄지며, WCH-LinkE나 PicoRVD 같은 전용 프로그래머가 필요하다. 펌웨어와 생산·개발 파일은 모두 저장소의 해당 폴더에 포함돼 있다.
직접 만들려는 사람을 위한 조건
제작 방법도 구체적으로 안내돼 있다. 기판은 JLCPCB에서 ENIG(무전해 니켈 금도금) 처리로 주문하고, 안쪽 보드용 스텐실을 함께 받은 뒤, 부품은 LCSC에서 구매해 손으로 납땜하는 방식이 권장된다. 모든 설계 파일이 오픈소스로 공개돼 있어 문양이나 형태를 바꿔 자신만의 버전을 만들 수 있다. 다만 제작자 스스로 '하루 만에 빠르게, 예산 한계 때문에 최대한 싸게' 설계했다는 점을 인정하며 재현은 각자 판단에 맡긴다고 덧붙였다. 예컨대 랜야드용 구멍이 아직 없어 지금은 끈을 기판에 감아 쓰는데, 보기엔 멋지지만 조립 편의성은 떨어진다는 식의 미완성 지점도 솔직히 드러난다.
국내 실무자 관점에서 이 프로젝트가 주는 시사점은 기술 난이도보다 접근 방식에 있다. 초저가 RISC-V MCU, 노출 솔더마스크를 이용한 광 확산, 테스트포인트를 활용한 기판 적층 같은 기법은 모두 특별한 장비 없이 재현 가능한 것들이다. 사내 행사 굿즈, 교육용 키트, 소규모 하드웨어 프로토타입을 고민하는 팀이라면 '무엇을 뺄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원가를 설계하는 이런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반대로 랜야드 구멍의 부재나 검증되지 않은 대량 생산 단가처럼, 하루짜리 설계가 남긴 한계도 함께 읽어야 실제 양산으로 옮길 때의 위험을 가늠할 수 있다.